1950년, 그는 홍익대학교 문학부 미술과 동양화 전공으로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며 학업은 중단되었고, 서울 회현동에서 대학 생활을 하던 그는 인민군에 끌려가 지도를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후 인 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자 인민군과 함께 북으로 향했지만, 기지를 발휘해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겨우 가족 품으로 돌아왔지만 전쟁으로 인해 아버지를 잃었고, 이번에는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었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도 살아남아 1951년 안성으로 돌아온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서울로 다시 올라가 미군 가족 초상화를 그리고, 장교 식당 벽화를 그리는 등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광주 육군보병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군대 문제를 해결했음에도, 정부는 입대 당시의 약속을 번복하며 현역 복무를 강요하였습니다. 현역 복무를 피하고자 박서보는 졸업식에 불참하고 친구와 함께 지은 가짜 이름으로 만든 가짜 시민증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에는 친구가 지어준 ‘박서보’라는 예명을 사용하며 활동을 계속했는데, 이는 단순한 예명이 아니라, 그가 겪은 역경과 새로운 시작을 담은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무렵, 젊은 예술가들이 꿈꾸던 등용문인 국립미술대전에서 입선하며 그의 이름이 미술계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1954년 홍익대학교 첫 졸업전을 소개한 서울 신문 기사에는 ‘박재홍’으로, 1955년 국전 특전 25점에 대한 연합 신문 기사에는 ‘박서보’란 이름으로 등장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1961년, 박서보는 세계청년미술가 초대전에 초청받아 파리로 향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는 자유아시아위원회의 지원으로 항공권과 보험료를 해결하며 간신히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도착 후 대회가 연기된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파리에서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새로운 시련을 마주했습니다.
그는 쓰레기장에서 스타킹, 러닝셔츠와 같은 폐품을 주워 작품 재료로 사용하며 창의적인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 ‘원죄’는 파리 청년 작가 합동 전시에서 1등을 차지하며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귀국 후 그는 제6회 현대작가초대미술전에서 국제 작가 초대부 일을 맡았고, 그의 작품이 여러 매체와 전시를 통해 보도되면서 명성을 쌓아갔습니다.